
그저 존재하고 대화하기
- 무성애 성토대회
무성애 가시화 주간을 맞아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가 무성애 성토대회를 열었습니다. 지난 23일 저녁 7시 30분부터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무성애 성토대회 <그저 존재하고 대화하기>가 온·오프라인을 포함해 30명 가량의 참가자들과 함께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이 날의 행사에는 자신의 경험과 고충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에이엄브렐라 당사자들과 더불어, 스스로의 지향성을 고민하는 에이엄브렐라 퀘스처너리, 그리고 공동체에서 함께하는 무성애자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맺고자 하는 앨라이들이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성애 가시화 주간 기념행사라는 컨셉에 맞추어 현장에는 보라색, 녹색의 비건 떡케이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이스브레이킹 – 하늘 아래 같은 무성애자는 없다!

행사에 사용한 피켓. 안 진지해보이면 어쩌나 하는 우려들이 있었지만, 현장 반응은 괜찮았다.
“에이엄으로 정체화한지는 오래됐는데, 주변에서 에이엄을 자만추하기가 힘들어서 항상 에이엄 토크에 갈증을 많이 느끼고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트위터에 홍보가 떠서 와보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참가자들의 자기 소개 순서가 있었습니다. 이름 또는 활동명과 함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오늘 모임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지 간략하게 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성애 성토대회’ 자리이니만큼 스스로를 에이엄브렐라 당사자라고 소개하는 참가자들이 많았고, 에이엄브렐라 친구와 토크, 그리고 커뮤니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사실 제가 무성애자인지 잘 모르겠어요.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나 혹시 무성애자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쩌면 진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퀘스처너리라 그런지, 스스로 무성애자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스로의 지향성을 고민하는 퀘스처너리 참가자들도 많았습니다. “네가 아직 연애를/섹스를 안 해봐서”, “좋은 사람 못 만나봐서”와 같이 정체성에 대한 부정, “연애/섹스를 하는데 네가 어떻게 무성애자야?”와 같은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같은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에 대한 반응들은 당사자들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곤 합니다. 또한, 에이엄브렐라에 관한 가시화도, 범주화도 구체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하기도 합니다. 꼭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설명할 단어와 범주를 찾기 위해 이런 모임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듣고, 저도 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좀 더 구체화하고 싶고,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짧은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밀도 있게 깊은 이야기들이 많이 오간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가시화가 잘 되어있지 않고, 커뮤니티나 단체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에이엄 지향성의 특성상 커질 수밖에 없는 말하기와 듣기, 교류의 욕구를 함께 나누고 공감했습니다.
1부 – 무성애 성토대회

성토대회에 사용한 패들릿 페이지. 트위터 타임라인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성토의 글들이 올라왔다.
“다들 ”진정한 사랑을 못 만나봐서 그래“라는 말에 어떻게 대처하며 사시나요?”
“유성애자인데 ‘진정한 사랑’ 별로 좋은 거 아닙니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 무섭게, ‘성토대회’라는 모임의 컨셉에 맞는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에이엄브렐라 개념에 대한 무지에 답답했던 경험들, 정체성에 대한 부정과 의심의 반응들, 성애와 연정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회에 대한 불편함과 타인과의 관계맺음에 대한 어려움까지. 에이엄브렐라로 살며 느끼는 고충들과 서러움에 대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무성애자로 커밍아웃하면 자주 들어서 열불나는 단골 멘트: ‘그게 왜 퀴어야? 무슨 차별을 받아?’”
퀴어 커뮤니티의 동료들에게까지 퀴어니스, 그리고 차별의 경험에 대한 의심을 받는 경험들 또한 나눴습니다. 시스-헤테로 사회에서뿐 아니라 퀴어들간의 관계에도 존재하는 유성애규범성에 더해, 정체성 자체뿐 아니라 이로 인해 생기는 차별의 경험들과 정치적 요구마저 잘 가시화되거나 구체적으로 언어화되지 못했다는 점은 에이엄브렐라 당사자들 역시 ‘퀴어’임에도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조차 잘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게 만들곤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에이엄 역시 사람이기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커뮤니티가 꼭 필요합니다.
“무성애자로 살면 ‘너는 감정이 없다는 거냐’, ‘성욕이 없다는 거냐’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한편으로는 그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에이엄은 사이코패스가 아닙니다’, ‘에이엄도 성욕 있고 연애도 합니다’ 같은 말들은 많이 하기도 하는데요. 그렇지만 에이엄도 전부 다른 사람들의 연속이잖아요. 사이코패시 에이엄도 있을 수 있고, 성욕도 없고 연애도 안 하는 에이엄도 있을 수 있죠. 그게 너무 답답했어요.”
한편으로는 에이엄브렐라 안에서의 ‘다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성토대회에 참가한 에이엄브렐라 당사자들 역시 연애 여부와 관계맺음의 형태가 모두 다양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이 일종의 ‘인권유린 상자’ 같다는 이야기를 한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서로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 ‘에이엄브렐라’라는 하나의 정체성 안에 욱여넣어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현장에서 큰 공감을 샀고,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지, 이들의 공통적인 요구를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발제 – 에이엄브렐라 재정의하기

케이 위원장의 발제 ppt. 케이 위원장은 에이엄브렐라를 "정상연애.결혼 규범과 불화하는 사람의 집합"으로 재정의하자고 제언했다.
“근대적인 형태의 연애는 산업사회의 출현과 함께 생겨났다. 도시로 이주한 노동계급은 자유롭게 상대를 탐색할 수 있었고, 자유연애는 점점 흔해졌다. 이에 따라 ‘끌림’이 연애/결혼의 중요 구성요건이 되었다. (...) 한편으로 자본가들은 더 큰 이윤을 창출하려 했고, 노동력을 값싸게 공급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로맨스 자체를 상품화하고, 상업적 연애를 관계맺음의 사회규범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노동력 재생산 또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통제하기 시작했다. 연애를 통해 결혼하는 생애주기가 당연해지고,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고민들을 이어받아 짧은 발제가 이어졌습니다. 노동당 성소수자위원장 케이가 <에이엄브렐라 재정의하기>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진행했고, 30분 가량의 발제를 통해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의 발생을 역사적, 유물론적으로 설명했고, 이를 바탕으로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에 대한 설명 또는 정의를 갱신하고 사회적인 요구를 만들자는 제언을 남겼습니다.
“성소수자 운동의 성과이기도 하겠지만, 현대사회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사회 구조의 유지를 위해 체제에 융화되기 쉬운 소수자를 제도 내로 편입시키기도 한다. 무성애자는 재생산의 플롯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에, 성장 중심의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제도 내로 편입되기 쉽지 않다.”
케이 위원장은 근대적 자유연애 개념이 산업사회의 출현과 함께 개발되었음을 지적, 이윤 극대화와 노동력 재생산을 전제로 하는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낳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케이 위원장은 또한 로맨스의 상품화와 인구재생산의 플롯에서 벗어나있는 에이엄브렐라 집단은 성장중심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와 근본적으로 불화하게 된다는, 에이엄브렐라 담론의 가지고 있는 변혁성에 주목했습니다.
“에이엄브렐라를 ‘성애/연정적 끌림이 부재한 사람들’이 아닌 ‘체제가 강요하는 정상연애·결혼 규범과 불화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정의하기를 제안한다. ‘하늘 아래 같은 무성애자는 없다’라는 말처럼, 에이엄브렐라를 ‘정상성의 여집합’으로 정의하고, 무성애 운동이 단순히 기존 체제에게 존재를 인정받는 것을 넘어 정상성 규범 자체가 발명된 것이며 허상임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분석에 기반하여, 케이 위원장은 에이엄브렐라를 정상성의 여집합적 개념, 즉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연애 규범에 불화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확장하길 제안했습니다. 케이 위원장은 가시화와 체제 내의 인정을 넘어 체제가 만든 정상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무성애 운동을 통해, 유성애중심적 문화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인구재생산을 전제로 한 성장중심주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발제를 마무리하며, 케이 위원장은 앞으로의 무성애 운동의 투쟁 과제들로 연애와 결혼 기반이 아닌 파트너십 제도, 가족 기반 돌봄이 아닌 돌봄의 사회화, 성장중심주의 체제에서 필요에 의한 생산이 이뤄지는 기후정의 사회로의 이행 등을 꼽았습니다.
2부 – 우리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려면

행사가 끝나고 함께 찍은 단체사진
“생활동반자법 제정이 필요해요. 다만 2인간의 결합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도 가능하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발제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발제 내용에 대한 공감의 내용과 더불어 무성애자들의 “살림살이”가 더 나아지기 위한 무성애 운동의 과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결혼, 애인, 파트너 관계를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공동체를 포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함께, 가족을 형성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권리, 공적 돌봄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해외의 무성애 연구 중에는 무성애가 ‘유성애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성애적인 것을 하는 것’으로 의미를 재정의하는 경우가 있어요. 무성애자들이 무성애자들 나름대로의 애정관계를 가지고, ‘무성애적인’ 활동들을 하지만 이런 것들이 타인의 시선에서는 정상성의 프레임 안으로 흡수되는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연구 결과들과 주목할 만한 해외 사례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발제의 주제와 유사한 내용의 연구 사례들이 소개되기도 했고, 공공돌봄 체계가 자리잡은 해외 사례의 소개 등을 통해 유성애적 가족 중심의 생애주기를 넘어선 삶의 모델들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내용들도 이야기되는 자리였습니다.
“성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유대감을 불러올 수 있는 관계들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편으로, 제도적 측면의 과제뿐 아니라 지배적 규범을 넘어설 수 있는 일상 속에서의 실천과 관계맺음에 대한 고민들도 함께 나눴습니다. 성애적/로맨틱적 관계가 아닌 다른 형태의 관계를 더 많이 발견하고 가시화하자는 이야기를 나눠준 참가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발제에서는 무성애 정체성과 구분되는 측면이 있다고 언급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비혼주의와 1인 가구 주체들과의 접점을 더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무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낳는 근본적 원인이 인구재생산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이니만큼, 성장주의에 대한 탈피와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이 무성애자의 삶에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을 나눠주신 참가자분들도 계셨습니다.
마무리 – 우리가좍 에이엄브렐라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에이엄 관련 성명 커버 이미지로 만든 포스터
“무성애 ‘가좍’들 함께 모여 떡 나눠먹고 있으니 이게 명절인가 싶네요. 내년에도 또 했으면 좋겠습니다.”
짧은 시간 진행된 모임이었지만 성토부터 과제까지 넓고 깊은 이야기들이 오간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이런 모임이 또 있었으면, 그리고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참가자들의 소감이 많이 나왔습니다.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는 에이엄 회원의 비중이 정말 높은 성소수자 단체이기도 합니다. 이 날 진행한 <무성애 성토대회> 기획은 에이엄브렐라 당사자 회원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기획이기도 했습니다. 성토대회에서 나눠주신 소중한 경험들을, 노동당의 실천과 정책을 만들어나가는데 소중한 자양분으로 삼겠습니다. 참가해주신 ‘가좍’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그저 존재하고 대화하기
- 무성애 성토대회
무성애 가시화 주간을 맞아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가 무성애 성토대회를 열었습니다. 지난 23일 저녁 7시 30분부터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무성애 성토대회 <그저 존재하고 대화하기>가 온·오프라인을 포함해 30명 가량의 참가자들과 함께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이 날의 행사에는 자신의 경험과 고충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에이엄브렐라 당사자들과 더불어, 스스로의 지향성을 고민하는 에이엄브렐라 퀘스처너리, 그리고 공동체에서 함께하는 무성애자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맺고자 하는 앨라이들이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성애 가시화 주간 기념행사라는 컨셉에 맞추어 현장에는 보라색, 녹색의 비건 떡케이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이스브레이킹 – 하늘 아래 같은 무성애자는 없다!
행사에 사용한 피켓. 안 진지해보이면 어쩌나 하는 우려들이 있었지만, 현장 반응은 괜찮았다.
“에이엄으로 정체화한지는 오래됐는데, 주변에서 에이엄을 자만추하기가 힘들어서 항상 에이엄 토크에 갈증을 많이 느끼고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트위터에 홍보가 떠서 와보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참가자들의 자기 소개 순서가 있었습니다. 이름 또는 활동명과 함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오늘 모임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지 간략하게 소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성애 성토대회’ 자리이니만큼 스스로를 에이엄브렐라 당사자라고 소개하는 참가자들이 많았고, 에이엄브렐라 친구와 토크, 그리고 커뮤니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사실 제가 무성애자인지 잘 모르겠어요.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나 혹시 무성애자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쩌면 진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퀘스처너리라 그런지, 스스로 무성애자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스로의 지향성을 고민하는 퀘스처너리 참가자들도 많았습니다. “네가 아직 연애를/섹스를 안 해봐서”, “좋은 사람 못 만나봐서”와 같이 정체성에 대한 부정, “연애/섹스를 하는데 네가 어떻게 무성애자야?”와 같은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같은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에 대한 반응들은 당사자들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곤 합니다. 또한, 에이엄브렐라에 관한 가시화도, 범주화도 구체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하기도 합니다. 꼭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설명할 단어와 범주를 찾기 위해 이런 모임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듣고, 저도 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좀 더 구체화하고 싶고,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짧은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밀도 있게 깊은 이야기들이 많이 오간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가시화가 잘 되어있지 않고, 커뮤니티나 단체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에이엄 지향성의 특성상 커질 수밖에 없는 말하기와 듣기, 교류의 욕구를 함께 나누고 공감했습니다.
1부 – 무성애 성토대회
성토대회에 사용한 패들릿 페이지. 트위터 타임라인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성토의 글들이 올라왔다.
“다들 ”진정한 사랑을 못 만나봐서 그래“라는 말에 어떻게 대처하며 사시나요?”
“유성애자인데 ‘진정한 사랑’ 별로 좋은 거 아닙니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 무섭게, ‘성토대회’라는 모임의 컨셉에 맞는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에이엄브렐라 개념에 대한 무지에 답답했던 경험들, 정체성에 대한 부정과 의심의 반응들, 성애와 연정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회에 대한 불편함과 타인과의 관계맺음에 대한 어려움까지. 에이엄브렐라로 살며 느끼는 고충들과 서러움에 대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무성애자로 커밍아웃하면 자주 들어서 열불나는 단골 멘트: ‘그게 왜 퀴어야? 무슨 차별을 받아?’”
퀴어 커뮤니티의 동료들에게까지 퀴어니스, 그리고 차별의 경험에 대한 의심을 받는 경험들 또한 나눴습니다. 시스-헤테로 사회에서뿐 아니라 퀴어들간의 관계에도 존재하는 유성애규범성에 더해, 정체성 자체뿐 아니라 이로 인해 생기는 차별의 경험들과 정치적 요구마저 잘 가시화되거나 구체적으로 언어화되지 못했다는 점은 에이엄브렐라 당사자들 역시 ‘퀴어’임에도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조차 잘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게 만들곤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에이엄 역시 사람이기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커뮤니티가 꼭 필요합니다.
“무성애자로 살면 ‘너는 감정이 없다는 거냐’, ‘성욕이 없다는 거냐’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한편으로는 그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에이엄은 사이코패스가 아닙니다’, ‘에이엄도 성욕 있고 연애도 합니다’ 같은 말들은 많이 하기도 하는데요. 그렇지만 에이엄도 전부 다른 사람들의 연속이잖아요. 사이코패시 에이엄도 있을 수 있고, 성욕도 없고 연애도 안 하는 에이엄도 있을 수 있죠. 그게 너무 답답했어요.”
한편으로는 에이엄브렐라 안에서의 ‘다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성토대회에 참가한 에이엄브렐라 당사자들 역시 연애 여부와 관계맺음의 형태가 모두 다양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이 일종의 ‘인권유린 상자’ 같다는 이야기를 한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서로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 ‘에이엄브렐라’라는 하나의 정체성 안에 욱여넣어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현장에서 큰 공감을 샀고,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지, 이들의 공통적인 요구를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발제 – 에이엄브렐라 재정의하기
케이 위원장의 발제 ppt. 케이 위원장은 에이엄브렐라를 "정상연애.결혼 규범과 불화하는 사람의 집합"으로 재정의하자고 제언했다.
“근대적인 형태의 연애는 산업사회의 출현과 함께 생겨났다. 도시로 이주한 노동계급은 자유롭게 상대를 탐색할 수 있었고, 자유연애는 점점 흔해졌다. 이에 따라 ‘끌림’이 연애/결혼의 중요 구성요건이 되었다. (...) 한편으로 자본가들은 더 큰 이윤을 창출하려 했고, 노동력을 값싸게 공급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로맨스 자체를 상품화하고, 상업적 연애를 관계맺음의 사회규범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노동력 재생산 또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통제하기 시작했다. 연애를 통해 결혼하는 생애주기가 당연해지고,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고민들을 이어받아 짧은 발제가 이어졌습니다. 노동당 성소수자위원장 케이가 <에이엄브렐라 재정의하기>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진행했고, 30분 가량의 발제를 통해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의 발생을 역사적, 유물론적으로 설명했고, 이를 바탕으로 에이엄브렐라 정체성에 대한 설명 또는 정의를 갱신하고 사회적인 요구를 만들자는 제언을 남겼습니다.
“성소수자 운동의 성과이기도 하겠지만, 현대사회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사회 구조의 유지를 위해 체제에 융화되기 쉬운 소수자를 제도 내로 편입시키기도 한다. 무성애자는 재생산의 플롯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에, 성장 중심의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제도 내로 편입되기 쉽지 않다.”
케이 위원장은 근대적 자유연애 개념이 산업사회의 출현과 함께 개발되었음을 지적, 이윤 극대화와 노동력 재생산을 전제로 하는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낳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케이 위원장은 또한 로맨스의 상품화와 인구재생산의 플롯에서 벗어나있는 에이엄브렐라 집단은 성장중심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와 근본적으로 불화하게 된다는, 에이엄브렐라 담론의 가지고 있는 변혁성에 주목했습니다.
“에이엄브렐라를 ‘성애/연정적 끌림이 부재한 사람들’이 아닌 ‘체제가 강요하는 정상연애·결혼 규범과 불화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정의하기를 제안한다. ‘하늘 아래 같은 무성애자는 없다’라는 말처럼, 에이엄브렐라를 ‘정상성의 여집합’으로 정의하고, 무성애 운동이 단순히 기존 체제에게 존재를 인정받는 것을 넘어 정상성 규범 자체가 발명된 것이며 허상임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분석에 기반하여, 케이 위원장은 에이엄브렐라를 정상성의 여집합적 개념, 즉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연애 규범에 불화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확장하길 제안했습니다. 케이 위원장은 가시화와 체제 내의 인정을 넘어 체제가 만든 정상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무성애 운동을 통해, 유성애중심적 문화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인구재생산을 전제로 한 성장중심주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발제를 마무리하며, 케이 위원장은 앞으로의 무성애 운동의 투쟁 과제들로 연애와 결혼 기반이 아닌 파트너십 제도, 가족 기반 돌봄이 아닌 돌봄의 사회화, 성장중심주의 체제에서 필요에 의한 생산이 이뤄지는 기후정의 사회로의 이행 등을 꼽았습니다.
2부 – 우리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려면
행사가 끝나고 함께 찍은 단체사진
“생활동반자법 제정이 필요해요. 다만 2인간의 결합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도 가능하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발제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발제 내용에 대한 공감의 내용과 더불어 무성애자들의 “살림살이”가 더 나아지기 위한 무성애 운동의 과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결혼, 애인, 파트너 관계를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공동체를 포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함께, 가족을 형성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권리, 공적 돌봄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해외의 무성애 연구 중에는 무성애가 ‘유성애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성애적인 것을 하는 것’으로 의미를 재정의하는 경우가 있어요. 무성애자들이 무성애자들 나름대로의 애정관계를 가지고, ‘무성애적인’ 활동들을 하지만 이런 것들이 타인의 시선에서는 정상성의 프레임 안으로 흡수되는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연구 결과들과 주목할 만한 해외 사례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발제의 주제와 유사한 내용의 연구 사례들이 소개되기도 했고, 공공돌봄 체계가 자리잡은 해외 사례의 소개 등을 통해 유성애적 가족 중심의 생애주기를 넘어선 삶의 모델들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내용들도 이야기되는 자리였습니다.
“성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유대감을 불러올 수 있는 관계들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편으로, 제도적 측면의 과제뿐 아니라 지배적 규범을 넘어설 수 있는 일상 속에서의 실천과 관계맺음에 대한 고민들도 함께 나눴습니다. 성애적/로맨틱적 관계가 아닌 다른 형태의 관계를 더 많이 발견하고 가시화하자는 이야기를 나눠준 참가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발제에서는 무성애 정체성과 구분되는 측면이 있다고 언급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비혼주의와 1인 가구 주체들과의 접점을 더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무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낳는 근본적 원인이 인구재생산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이니만큼, 성장주의에 대한 탈피와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이 무성애자의 삶에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을 나눠주신 참가자분들도 계셨습니다.
마무리 – 우리가좍 에이엄브렐라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에이엄 관련 성명 커버 이미지로 만든 포스터
“무성애 ‘가좍’들 함께 모여 떡 나눠먹고 있으니 이게 명절인가 싶네요. 내년에도 또 했으면 좋겠습니다.”
짧은 시간 진행된 모임이었지만 성토부터 과제까지 넓고 깊은 이야기들이 오간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이런 모임이 또 있었으면, 그리고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참가자들의 소감이 많이 나왔습니다.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는 에이엄 회원의 비중이 정말 높은 성소수자 단체이기도 합니다. 이 날 진행한 <무성애 성토대회> 기획은 에이엄브렐라 당사자 회원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기획이기도 했습니다. 성토대회에서 나눠주신 소중한 경험들을, 노동당의 실천과 정책을 만들어나가는데 소중한 자양분으로 삼겠습니다. 참가해주신 ‘가좍’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